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라위 왕조 (문단 편집) === 식민 지배와 저항 === 하산 1세의 치세에 열강의 입김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12개국과 체결한 1880년의 마드리드 협정에서 열강들은 각자 소유한 모로코내 부동산과 재산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모로코 내부 역시 분열된 상황에서 하산은 1893년 6개월에 걸친 순행에 나섰다. 하산은 케니프라, 서사하라 일대의 카이드를 새로 임명했는데 그들은 후일 프랑스에 대한 독립 투쟁의 주요 지도자들이 되었다. 순행을 마친 후 하산은 1894년 6월 마라케쉬에서 사망하였고, 라바트에 매장되었다. 그를 계승한 아들 압델아지즈의 치세에는 열강들이 모로코를 두고 다투며 1905년 [[모로코 위기]]와 1906년 [[알헤시라스 회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마라케쉬에서 군중에게 프랑스 인이 살해된 것을 핑계로 프랑스 군이 침공, 우지다를 점령하였다. 같은해 [[카사블랑카]]에서는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 철도 노동자들이 살해되었고, 이에 프랑스 함대가 도시를 포격한 후 장악하였다. 혼란이 이어지던 무렵 마라케쉬 총독이던 압델아지즈의 형 압델하피드가 술탄의 친유럽 행보를 비난하며 카이드 마다니 알 갈루이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908년 압델하피드는 페스를 점령, 모로코 내륙을 장악하였고 압델아지즈는 라바트에서 해안 일대만을 통치하였다. 같은해 압델하피드는 동생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이듬해 압델아지즈가 양위하고 탕헤르로 은퇴하면서 압델하피드가 단독 술탄이 되었다. 1911년 재차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자 독일이 개입하였으나 결국 협상을 통해 물러났고, 거칠 것이 없어진 프랑스는 1912년 3월 30일 압델하피드를 압박하여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된다는 페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4월 17일 페스 주민들과 군인들이 봉기하여 약 백여명의 유럽인과 유대인들을 죽였으나, 프랑스 군의 포격으로 6백명이 살상당하며 진압되었다. 같은해 8월 압델 하피드가 동생 유세프에게 양위하자 남부의 카이드 아흐마드 알 히바 역시 타루단트에서 술탄을 칭하며 봉기하였다. 반외세를 주장한 알 히바는 아가디르와 다라 협곡 등 남부 일대와 갈루아 가문의 지지를 받으며 8월 18일 마라케쉬에 입성하였다. 진압에 나선 프랑스 군은 9월 6일 마라케쉬 부근 시디 부 우스만 전투에서 알 히바를 격파하였고, 2천여 부족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이후 알 갈루아 가문은 프랑스 측으로 전향하였고, 알 히바는 수스 지방으로 밀려났다. 다만 그는 1919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저항을 이어나갔고, 사후 동생 메렙비 렙부 역시 고산 지대에서 반란을 지속하였다. 북부 리프 지방에서는 1921년 압델 카림이 봉기하여 스페인 군을 몰아내고 [[리프 공화국]]을 건설,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4년간 독립을 유지한 리프 공화국은 1925년 스페인-프랑스 공동 토벌로 붕괴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상황 속에서 술탄 유세프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한 해안의 [[라바트]]로 거처를 옮겼고, 이로써 현재까지 모로코의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다. 1927년 유세프는 사망하였고, 현대 모로코를 이룩한 아들 [[무함마드 5세]]가 계승하였다. 그의 지도 하에 모로코는 1955년 독립하였고, 현재 그 손자인 [[모하메드 6세]]가 재위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